아꼬운 귤 따레 가보카? 

확실히 해가  짧아졌습니다. 저는 보통 새벽 5시쯤 일어나는데, 언제부턴가 집을 나설 때도 해가 완전히 뜨지 않더라고요. 엊그제 같던 입추가 지나고 어제는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였습니다. 밤 8시에나 지던 해가 7시가 조금만 넘어도 퇴근해 버리는, 지척에서 가을이 오고 있었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조금 이르다는 걸 알면서도 귤 생각이 납니다. 요즘은 하우스 귤이 많이 나와서 1년 내내 사시사철 귤을 먹을 수 있지만, 제가 어릴 때 귤은 제철인 겨울에만 먹는 과일이었습니다. 겨울 방학 때 엄마가 베란다에 귤 한 상자를 사다 놓으면 저희 삼 남매는 손끝이 노오래지도록 귤을 먹어서 2~3일 만에 금세 박스의 바닥이 보이곤 했습니다. 

귤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먹기 쉬운 과일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다른 과일처럼 씻거나(귤도 껍질을 씻기는 해야 한대요,,) 껍질을 칼로 깎지 않아도 되니까요. 아주 작은 힘만 주어도 연하고 부드러운 껍질을 슥슥 깔 수 있는, 맘만 먹으면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늘 좋았거든요. 또 추운 겨울에 맛볼 수 있는 상큼한 여름의 맛 같기도 해서 좋아합니다. 돌이켜 보니 저는 귤 덕분에 길고 긴 겨울을 즐길 수 있게 되었네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선선합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좋은 계절은 곧 겨울을 부르겠지요. 귤이 알맞게 영그는 계절을요. 언젠가부터 찬바람이 불면 귤을 먹으며 꼭 이 그림책을 펼치게 되곤 합니다. 

표지엔 동글동글 크기가 다른 두 개의 귤이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습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습니다. 귤 속에 표정이 있으니 마치 사람 얼굴 같습니다. 저는 보통 책의 띠지를 책갈피로 쓰거나 쉽게 빼서 버리곤 하는데요. 이 그림책에는 책을 감싸는 카디건 같은 큰 띠지에 귤나무와 귤 그림이 한가득합니다. 당연히 지금도 띠지는 책과 함께 고스란히 보관 중입니다. 

귤색 면지를 넘기자 구름을 닮은 머리 모양의 주인공이 막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는 화자는 그림 그리는 일을 기다리며,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긴 긴 겨울을 맞습니다. 하지만 그는 겨울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겨울은

난로를 부르고

난로는 귤을, 

귤은 나를 부른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을 부른다. 

다들 ‘귤’ 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요. 저는 추운 겨울에 나오는 귤을 뜨끈한 방바닥에서 엎드려(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세. 위산 역류 조심) 까먹으며 TV나 만화책을 보던 날이 떠오릅니다. 새콤한 맛은 추위로 잔뜩 웅크린 어깨도 활짝 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샛노란 해를 닮은 귤의 예쁜 주황색은 메마른 겨울 풍경에 달콤함을 더해 주었고요. 감기에 좋은 비타민C가 풍성하다고 하니 죄책감 없이 앉은 자리에서 열댓 개는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화자는 고향이 제주입니다. 오랜만에 집에 왔지만 엄마는 자러 왔냐며(화난 거 아님) 봐주지 않습니다. 귤 따러 가려면 이른 시각부터 움직여야 하거든요.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만 있고 싶은 겨울이지만, 엄마의 부름에 무거운 눈을 뜨고 과수원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싣습니다. 

하늘보다 깜깜한 오름

오름보다 깜깜한 삼나무를 지나

하나, 둘 과수원으로 모여든다. 

과수원에 도착해 언 몸을 녹이고, 따뜻한 국수로 속을 든든히 채우면 드디어 해가 뜹니다. 그리고 노오란 귤로 가득한 귤나무로 향합니다. 5월엔 콩알만 하게 작던 귤이 어느새 주먹만큼 크게 자랐습니다. 팔 수 있는 귤과 팔 수 없는 귤을 솎아내며, 사람들은 각자의 나무에서 귤을 따다가도 모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볕은 따스하다가도 과랑과랑 

비는 반갑다가도 곱곱하고

바람은 살랑살랑 부드럽다가도 팡팡불었겠지.

늘 순하기만 한 것은 아닌 자연 덕분에 귤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롱조롱 열렸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다르게 생긴 것처럼 귤도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자라납니다. 바구니를 가득 채워 귤을 따면 힘센 이가 나타나 바구니를 비워주고, 다시 새로운 나무 앞에서 또각또각 귤을 따다 보면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오지요. 점심시간입니다. 

노란 귤밭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꿀맛이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사위가 캄캄해집니다. 당장 일을 못해 아쉬워도, 변화무쌍한 제주의 날씨 덕분에 사람들은 잠시 쉬어 갈 수 있습니다. 

어떵은 어떵 아장 놀믄 되주게(어떡하긴 어떡해. 앉아서 놀면 되지).

귤을 못 따 걱정하는 말에 다른 이가 대답합니다. 앉아서 놀면 된다고요. 화자는 잘 마시지 않던 믹스커피도 마시고, 귤을 구워 먹으며(와! 어떤 맛일까요? 올 겨울엔 꼭 구워 먹어 봐야지.) 선물처럼 찾아온 휴식을 만끽합니다. 살랑살랑 불다가 팡팡 불던 바람이 다시 살랑살랑으로 돌아올 무렵, 먹구름이 가시고 쨍, 볕이 납니다. 노을에 귤나무 잎도 귤빛으로 물들 때면 일을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요. 이렇게 오늘 하루 귤 따는 일이 끝났습니다. 

엄마, 근데

무사?

얼굴이 왜 그렇게 노래?

지는-

귤을 하도 많이 까먹은 화자와 엄마의 얼굴과 손톱이, 손바닥과 발바닥도 노래지는 겨울. 두 사람의 얼굴은 표지 속 귤 사람과 쏙 닮았습니다. 

어둠도 깜깜하지만은 않고

추위도 따뜻해지는 시간.

『귤 사람』은 만화식 구성으로 그린 그림책입니다. 칸칸이 나뉜 그림 안에 말풍선으로 인물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빈 여백에는 화자의 나레이션이 이어집니다. 네모난 칸을 옮겨 가며 읽다 보면 나레이션 부분은 자연히 적당한 호흡으로 쉬어가며 읽을 수 있습니다. 담백한 이야기를 입 속에서 한참을 굴리면서 천천히 따라 읽어 봅니다. 사이사이 말풍선 속 낯선 제주 사투리에 담긴 뜻을 상상하면서요. 여백이 많은 그림에 앉아 자주 쉬기도 했습니다. 어느 장면에서나 그럴 수 있었지요. 

돌이켜 보면 추워서 싫은 날도 분명 많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하니 좋은 것만 떠오릅니다. 겨울엔 좋아하는 귤이 나오고, 춥기에 따끈하고 포근한 이불 속 시간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또 비는 사계절 내내 오지만 눈은 겨울에만 오니까 겨울이 더 좋아지고요.

좋은 것은 좋은 것을 부를 것이다. 

이제 막바지 무더위가 지나면 가을이 옵니다. 좋은 것들을 더 많이 상상하며 귤 사람과 함께 다가올 겨울도 손꼽아 기다려 봅니다. 

새콤달콤한 귤 이야기 맛있게 읽으셨나요? 다음 그림책 바구니는 이번 시즌의 마지막 편, 스무 번째 바구니로 찾아 뵙겠습니다.

아기가 최근 새로 배운 말이 있습니다. 

"파! 빠! 빠 ㅇ!" 

크 - 자식도 드디어 빵 맛을 알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는 아기도 단숨에 달랠 수 있는 '빵' 이야기로 가득한 『김철수빵』과 함께 9월 7일 수요일에 만나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