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 같은 엄마와 고슴도치 X 

제가 아기를 낳은 후 저희 부부를 키운 어머니 두 분은 엄마 아빠를 닮으면 아기 키우기가 아주 쉽겠네,라는 말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어머니,,,,안 쉬워요) 저의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저는 눕혀 놓으면 놓는 대로 혼자 가만히 잘 노는 아기였고(덕분에 뒤통수가 납작), 동반자의 어머니도 동반자가 혼자 놀다 혼자 자는 순하디순한 아기였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우리 아기는 우리와 정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아기는 밥 잘 먹고 잘 자는, 남들은 순하다고 말하는 기질의 아기였지만, 아주 열정적이고 격정적인 기질을 타고났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아주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했고, 싫은 건 너무 싫고 좋은 건 너무 좋은, 표현력이 무척 뛰어난 아기입니다. 또 언제나 잠시도 가만있지 않아서 먹는 만큼 살이 찌지 않더라고요. 

결혼과 임신, 출산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던 때, 좋아하는 만화가인 난다 작가님의 『내가 태어날 때까지』 와 『거의 정반대의 행복』을 읽었습니다. 지금도 임신, 출산, 육아를 앞둔 친구들에게 자주 선물하곤 하는 책 세트인데요. 『내가 태어날 때까지』 는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는 부부의 마음을 그린 만화이고 『거의 정반대의 행복』은 난다 작가님의 소소하지만 특별한 육아 일기입니다. 이 두 책을 읽으며 언젠가 아기를 낳으면 이런 마음으로 키워야지, 평범한 스케치북 같은 엄마이자 보호자가 되어야지 다짐하곤 했습니다. 가끔 아기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밥을 던지며 장난치거나(제 화 버튼) 응가 기저귀를 갈지 않으려 할 때(제 눈물 버튼) 성질이 뻗치지만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이 아이는 나와 다른 어엿한 ‘사람’이라고. 

『고슴도치 엑스』는 책 취향이 확실한 제 자식이 요즘 자주 꺼내 보는 책입니다 두 살 아기에겐 분량이 퍽 벅차지 않을까 생각하며 읽어 주곤 했는데요. 하지만 언제나 책의 마지막 이야기인 뒤표지까지 집중해서 읽고 금방 다시 읽어 달라고 조르더라고요. 그 모습이 꼭  난 이 책의 주인공 같은 사람이니까 엄마는 알고 계셔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 눈에는 너무 예쁜 고슴도치이지만, 아기인 저는 아직 그 무엇도 정하지 않은 무궁무진한 미지수 X라고 말이지요. 

여기 안전하고 세련된 도시 ‘올’이 있습니다. 

거리마다 스피커에서 잔잔하게 울리는 도시 찬가와

집집마다 ‘가시부드럽게비누’를 배달하는 트럭 소리.

내가 사는 도시 ‘올’의 아침이야.

아이는 매일 아침 ‘가시부드럽게비누’로 거품 목욕을 합니다. 이 비누는 가시를 촉촉하고 '힘없게' 만들어 줍니다. 욕조에서 충분히 불려 부드러워진 가시를 열심히 빗질하면 뾰족뾰족한 가시가 아주 부드럽게 변합니다.

요호! 역시 난 멋있어.

이런, 미처 내리지 못한 붉은 가시가 삐죽 올라왔네요. 

안전하고 세련된 도시 ‘올’은 뭐든 정갈하고 질서정연합니다. 이 도시에 사는 이들은 모두 머리를 곱게 다듬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걸어 다니지요. 그런 이들 사이에서 아이는 자기만의 속도로 쌩쌩 달려 학교로 향합니다. 아이가 다른 고슴도치와는 뭔가 조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모든 학생들은 등굣길에 가시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그 검사에서 탈락하면 ‘교양 있는 가시’ 수업을 들어야 합니다. 앗, 그런데 아이는 검사 결과 뾰족한 가시가 세 개나 나왔습니다. 아이는 쉬는 시간에 놀다가 그가시로 풍선을 터트려 학생 세 명을 기절시키고 맙니다. 결국 도서관 청소라는 벌을 받고 말고요. 

하지만 우리의 고슴도치에겐 오히려 반가운 벌입니다. 도서관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노인경 작가님의 그림책 『책 청소부 소소』가 떠오르네요!) 그런데 신나게 청소를 즐기던 아이의 눈에 무언가로 꽁꽁 동여맨 책 한 권이 보입니다. 

어디 한 번 볼까?

그렇게 금서를 찾은 아이에게 책 속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깊은 숲속에 시원하고 맑은 못이 있었지.

동물들이 모두 모여 맑은 못을 즐기던 어느 날, 정체불명의 돌덩이가 떨어져 물줄기를 뚝 끊어 버리고 맙니다. 이웃 숲 동물들까지 나서 돌을 밀어보려 했지만 돌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고슴도치 한 마리! 고슴도치는 쉬지도 않고, 가시가 부러져도 몸을 날려 바위에 구멍을 뚫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돌 틈으로 맑은 물이 세차게 쏟아졌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자기를 알아 가고 찾아가고 격려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에게 스스로의 팬이 될 기회를 주세요.

_ 노인경 

우리 속담 중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가지 뜻이 있는데요.

1. 성격이 너그럽지 못하면 대인 관계가 원만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

2. 너무 뛰어난 사람은 남에게 미움을 받기 쉬움을 이르는 말.

저는 이 속담이 1번과 2번의 뜻을 두루 아우른다고 생각합니다. 잘난 대로 생긴 대로 자기 모습을 그대로 내 보이면 세상 살기 힘들다는 말이지요. 그 말에는 뛰어난 재능이나 특별한 개성을 지닌 상대방에 대한 애정도 담겨 있습니다. 내가 아끼는 사람이 세상에서 두루 잘 살기 바라는 마음이겠지요. 

『고슴도치 엑스』를 읽고 나니 둥글둥글하게 살자,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이 과연 상대방을 위해 꼭 좋은 말인가 의심하게 됩니다. 내 뾰족한 가시를 곧게 펴 납작하고 부드럽게 만들어 사는 게 전혀 즐겁지 않다면 특히 더 그렇지요. 『고슴도치 엑스』는 생긴 그대로, 본디 난 그대로 우리는 충분히 멋지다고 응원해 주는 이야기 같습니다. 작가님 말씀처럼 아이 ‘스스로 팬이 될 기회’를 주는 그림책이지요. 

얼마 전 지친 몸으로 퇴근해 아기에게 밥을 먹이고 양치를 시키다가 끝내 엉엉 운 사건이 있었습니다(아기가 아니라 제가요). 언제나처럼 아기는 양치를 거부했고, 아기가 손수건으로라도 조금 닦아 내려던 제 손을 아주 세게 앙 깨물었지요. 순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분노가 크게 일고 손도 너무 아파서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아기도 따라 울고요. 그날 밤, 육아 관련 조언을 모아 둔  메모장을 열어 꼼꼼히 다시 읽었습니다. 

어차피 어떻게 키워도 아기는 본성대로 크겠죠. 고슴도치 엑스를 보며 그냥 같이 있어 주는 스케치북 같은 엄마가 되자,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하지만 양치는 해야 돼,, 넌 나중에 엄마에게 크게 고마워하게 될 거다 자식아). 

부드럽게 흐물거렸던 가시를 다시 ‘원래대로’ 곧고 단단하게 편 고슴도치 엑스. 본성대로, 생긴대로, 이름처럼 사는 멋진 아이, 엑스의 이야기를 담은  『고슴도치 엑스』였습니다. 

뾰족뾰족 즐거운 고슴도치 이야기 재미나게 읽으셨나요? 노인경 작가님의 인터뷰 영상을 마지막으로 보시면, 작가님의 전 작품을 모두 만나고 싶어질 거예요.

정말 비가 무지막지하게 왔던 지난 며칠이었어요. 모두 여러 가지 일로 고생 많으셨지요? 아무쪼록 남은 여름을 안전하고 건강하게 보내시길 멀리서 응원합니다. 

벌써 열여덟 번째 바구니로 구독자님들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복직 후 만족스러운 만큼 글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던 적도 있지만, 좋은 그림책을 꼼꼼히 다시 보게 됐던 행복한 시간들이었어요. 열아홉 번째 그림책 바구니에는 한여름에 더욱 그리운 과일, 귤을 가득 담은 그림책 『귤 사람』을 담아 볼게요. 

그럼 8월 24일 수요일에 만나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