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 덜컹 덜컹 덜컹

새벽 4시 20분. 평소라면 새벽 5시쯤 진동 소리에 눈을 뜨는데, 오늘은 자다 깬 아기가 심하게 우는 소리에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습니다. 얼른 아기방으로 달려가 옆에 누워 가슴을 도닥이고 달래 줍니다. 그러나 잠이 깬 아기는 도통 다시 잠들 줄을 모르고 그러기를 사십여 분, 동반자가 아기방으로 들어와 바통을 터치합니다. 저는 아기에게 잘 자라고 인사하고 출근 준비를 서두릅니다. 

새벽 6시 00분.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습니다. 오로지 앞과 시계만 번갈아 보며 지하철을 타기 위해 내달립니다. 드디어 역에 도착. 줄을 선 사람들 뒤로 서서 가방 속 책을 꺼냅니다. 6시 20분. 정해진 시간에 맞춰 제가 탈 첫 번째 지하철이 들어옵니다. 

이른 시간임에도 지하철에는 자리가 없습니다. 멍하니 서서 몇 정거장을 지나고 환승을 하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깁니다. 다시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고 타고 환승하고 내리고를 반복해 총 4개 노선의 지하철을, 아침에만 세 번의 환승을 거쳐 회사에 도착합니다. 쉬지 않고 달리면 1시간 15분, 지하철이 조금 밀리면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리는 출근길입니다. 최단 거리로 출근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이지요. 

이번 역은 합정, 합정역입니다. 

정신이 번쩍 듭니다. 마지막 환승을 해야 하거든요. 흔들리는 지하철이 마치 저를 흔들어 깨워 주는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저의 하루가 시작됩니다. 저를 열심히 실어 날라 준 지하철 덕분에요. 

어린 시절 부모님은 내게 많은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쁜 돌멩이와 작은 물고기, 까만 밤 서로의 얼굴을 비추던 하얀 달, 어린 나의 길 위에서는 많은 것들이 반짝였습니다. 어느덧 어른이 되어 걷는 발걸음은 바빴습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지나치며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길 위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주름진 손을, 가지각색의 얼굴을, 다양한 표정의 발을 그림으로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이 하나둘 쌓이고, 나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길 위에 있던, 가까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 김효은 

나는 지하철입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무채색 사람들이 그려진 표지 그림을 펼치자 아름답고 푸른 새벽 어스름이 펼쳐집니다. 저 멀리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로 지하철이 달리고 있습니다. 촉촉한 새벽 공기 내음이 밀려옵니다. 물기 머금은 그림을 뒤로 하자 에스컬레이터 위 어디론가 바삐 향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는 오늘도 달립니다.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길을.

어디에선가 와서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을 싣고 

한강을 두 번 건너며 땅 위와 아래를 오르내립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 길 마디마디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덜커덩 덜컹 덜커덩 덜컹

이번 역은 성수, 성수역입니다. 

지하철 문이 치- 열리는데 어린이와 그 어린이 손을 잡은 엄마까지 두 사람이 보입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엄마 품의 작은 아기까지 세 사람입니다(존경합니다, 어머니). 여보, 아줌마, 엄마, 애기 엄마, 연우 어머니로 불리기까지 온종일 쉴 새 없이 바쁜 유선 씨의 하루가 펼쳐집니다, 지친 하루의 끝에 유선 씨는 엄마 전화를 받습니다. 

“유선이니?” 오늘 처음으로 유선 씨의 이름을 불러 준 이는 유선 씨의 엄마입니다. 

나는 우리 엄마 막내딸

유선, 정유선. 

겁보, 울보, 잠보 유선 씨가 자리에 앉자 지하철은 다시 출발합니다.

덜컹 덜컹 덜컹 덜컹

이번 역은 구의, 구의역입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멋진 구두 한 짝이 가장 먼저 보입니다. 구로동에 사는 재성 아저씨의 구두입니다. 재성 아저씨는 신발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세상 여기저기를 다닌 신발들을 멋지게 수선하는 마법사입니다. 재성 아저씨네 구둣방 앞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밥을 먹고 있네요. 넉넉한 솜씨만큼이나 넉넉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신문을 보던 재성 아저씨는 찬찬히 사람들의 신발을 보고, 지하철은 다시 달리기 시작합니다.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컹

이번 역은 강남, 강남역입니다. 

문틈 사이로 휴대전화를 코끝까지 들어 올린 나윤이가 오랜만에 지하철을 탑니다. 앞을 잘 보고 타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수학, 영어, 논술 빽빽한 학원 간판 사이로 나윤이의 고된 하루가 상상됩니다. 제 몸만 한 가방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윤이를 만나게 된다면 꼭 떡볶이를 사주고 싶습니다. 지하철은 나윤이의 지친 마음을 싣고 다시 출발합니다. 

바로 그때,

에에- 신사 숙녀 여러분! 바쁘신 길이지만 잠시만 귀 기울여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기똥찬 물건을 싣고 뭐든지 파는 구공철 씨의 목덜미가 유독 붉습니다. 아- 공철 씨, 어쩐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요. 

덜컹 덜컹 덜컹 덜컹

이번 역은 신림, 신림역입니다.

이번엔 누굴까요?

책에는 스물아홉 도영 씨의 사연이 나오지만, 저는 이 장면에 제 이야기를 넣어 보고 싶어졌습니다.  

앗, 바구니 씨다! 

오늘도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바구니 씨가 탈 때는 언제나 자리가 없어요. 완주 씨가 가장 먼저 내릴 텐데, 거기 문 앞에 서지 말고 요기 완주 씨 앞에 서요 바구니 씨! 오, 오늘은 웬일로 나윤이가 빨리 내리네요. 아, 다행이에요. 바구니 씨가 정말 오랜만에 앉아서 출근하는 길, 내 마음도 기쁘게 다시 출발합니다. 

나는 일곱 칸 의자 위 일곱 개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 봐요.

덜컹 덜컹 덜커덩 덜컹

서울을 빙글 한 바퀴 돌았어요.

나는 다시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맞이할 준비를 해요.

덜컹 덜컹

덜컹 덜컹

이번 역은 신도림, 신도림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지하철 문이 열리기 직전, 지하철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어른 보입니다. 문이 열리자, 색색의 얼굴이 하나둘 제 눈에 차오릅니다. 그동안 바빠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바로 우리 곁의 얼굴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가득 싣고

덜컹 덜컹 덜컹 오늘도 우리는 달립니다.

오후 5시. 서둘러 가방을 챙겨 회사를 나옵니다. 5시 10분 지하철을 반드시 타야 하거든요.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지고, 하루에 유일하게 보는 아기 얼굴이 1시간 반 남짓인데 그마저 줄어 들게 됩니다. 퇴근길은 출근길보다 더 분주합니다. 환승할 때 사람도 많고 지하철엔 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을 기계적으로 지하철에 싣습니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어요. 그런데 문득 평소와 다르게 조금 욕심이 났습니다. 잠을 너무 못 자서 그런지 진짜 앉고 싶다, 너무너무 앉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자리가 나지 않을 테지만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언제나 서서 갔던 지하철 칸에 갑자기 한두 자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저보다 빠른 사람들이 있었기에 제 자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두어 자리를 보낸 후 또! 자리가 났습니다. 아, 앉고 싶다. 그렇지만 저 앞에 서 계시는 분이 앉겠지 하고 포기했는데 자리가 계속 비어 있었습니다. 저는 서둘렀지요. 오 이런 행운이! 퇴근할 때 거의 처음으로 앉아보는 것 같았습니다. 찰나였지만 지친 몸을 쉬기에 얼마나 좋았던지요.그런데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고 다시 환승한 지하철에서 또 이런 생각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 앉고 싶다. 

역시나 지하철에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오늘따라 가방은 또 왜 이렇게 무거운지. 눈은 그보다 무거웠고요. 그때 누가 자꾸 제 가방을 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착각인가 했지만 여러 번 반복되니 이상했습니다. 들고 있던 책을 내리고 가방 쪽을 바라보니, 제 앞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께서 다음 역에 내리니 여기 앉으라고 미리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습니다. 감사하다고 눈으로 인사드리고 잠시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그제야 같은 지하철 칸에 탄 사람들 얼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집에 가는 고등학생, 저와 같은 퇴근길의 직장인들,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는 어르신들, 엄마 손을 잡고 탄 아이들까지.

기차와 지하철, 버스는 참 신기한 공간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나란히, 그것도 아주 가까이 앉아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가니까요. 이들과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고, 또 영영 알 수 없는 사이가 되겠지만 꽤 오랜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낸다는 것에 어쩐지 마음이 쓰이는 날이 가끔 있기도 했었습니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자 노을 지는 한강을 배경으로 지하철이 지나갑니다. 무심코 흘려보냈던 우리 이웃들의 얼굴도 하나둘 스쳐 갑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다시금 하나둘 피어오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한 사람 한사람의 인생을 태어날 때부터 쭉 지어 이야기를 만든 작가님 덕분에, 그냥 행인 1로 지나쳤을지 모를 우리 이웃들의 삶을 깊고 또 깊게 그들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던 이야기 『나는 지하철입니다』였습니다.

그림책 『나는 지하철입니다』 제작 비하인드

*작가님 눈 밑에도 그림책에 나오는 '도영 씨'처럼 예쁜 점이 있네요. 

투표하러 잘 다녀오셨나요? 저는 아기가 깨기 전 후딱 다녀와서 모처럼 평일에 아기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 그림책 바구니에는 돌멩이에 환장했던 아기가 변심해서 열심히 나무똥을 줍는 이야기를 담아 볼게요. 세바스티엥 페레즈, 안로르 파로 작가의 그림책 『나무도 똥을 눈다고?』를 함께 보며 자연과 친구가 되는 싱그러운 여름을 시작해 보아요. 이 책의 기획편집자이자 제가 애정하고 애끼는 동료, 이예스 편집자님을 모시고 짧은 인터뷰도 나눠볼게요. 편집자님께 궁금하신 게 있다면 아래 링크에서 자유롭게 질문을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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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2주 뒤 6월 15일에 다시 만나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