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자라는 아기와 즐거운 인생

아기가 갑자기 걷기 시작했습니다. 12개월 즈음부터 곧잘 짧게 걷기는 했는데 그래도 주로 기어 다니는 게 일상이었거든요. 그런데 어제부터는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때 바닥을 딱 짚고 멋진 포즈로 일어서더니 똥똥한 두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가더라고요(그래도 여전히 먹을 것을 보면 네 발로 달려오긴 합니다).

아기는 매일매일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나 다른, 엄청나게 발전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아기와 살다 보면 인간의 수많은 ‘처음’을 눈으로 몸으로 마주합니다. 처음으로 나를 향해 웃어주던 배냇짓, 첫 이가 올라오려고 구멍이 뿅 뚫린 잇몸, '엄마'를 처음 말하던 날, 뒤집기, 앉기, 서기 그리고 처음 두 발로 걷던 날까지.

아기가 세상의 처음을 하나씩 경험할 때마다 기억나지 않는 제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얼마나 즐겁고 재밌을까요. 내 몸에서 이렇게 신기한 일이 매일매일 일어난다는 것이요.

그림책 『물이 되는 꿈』 은 아기가 가만히 누워만 있을 때, 아기의 등허리 힘을 기르기 위해 엎드려 놀게 할 때 자주 보여준 책입니다. 흔히 터미타임이라고 부르는 엎드린 자세는 아기의 전신 근육을 발달시킨다고 합니다.

『물이 되는 꿈』 은 기다란 병풍처럼 늘어놓고 아기 주변을 원으로 둘러싸 세워 둘 수 있었습니다. 당시엔 제가 눕히면 눕히는 대로, 엎드리면 엎드리는 대로 크게 움직임이 없으니 가만히 한 자세로 그림책을 바라보곤 했지요.

요즘엔 이 그림책을 펼쳐서 구르고, 찢고, 춤추며 놀이합니다. 파도처럼 출렁이게 흔들다가도 융단처럼 깔아 놓고 모델 워킹을 하기도 하고요. 아기가 자라면서 그림책도 어떤 모습으로든 변신하며 참 재미난 놀잇감이 되어 주었습니다. 

물이 꾸는 꿈

『물이 되는 꿈』 은 그림책 표지 제본에 자주 사용하는 딱딱한 양장이 아닌, 조금 단단하고 두껍지만 말랑말랑한 책의 표지이자 재킷이 그림책 속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 표지는 마치 우리가 입는 재킷처럼 쉽게 벗겼다가 다시 입힐 수 있습니다.

표지를 펼치면 자유롭게 물속을 유영하는 아이의 미소, 그 곁을 맴도는 바다사자, 나비와 새들……그리고 물속에 또 무엇이 보이나요? 그림책을 길게 열고 루시드 폴 님의 노래 <물이 되는 꿈>을 들으며 함께 볼까요. 

아이가 물에 몸을 담그자 몸이 둥둥 떠오릅니다. 몸과 손목, 발목을 감싼 도구가 유난히 무겁게 눈에 띕니다. 동그랗고 매끈한 수영 모자를 쓴 이가 아이 곁을 지키고 있네요.

물은 어디로든 흐르고 이어지며,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온다. 물은 순환된다. 이 노랫말도 그렇다. 책의 형식은 금방 결정되었다.

– 『창비어린이』 70호 <그림책 『물이 되는 꿈』 작업 이야기>

그런데 물속에서 유영하는 아이, 가벼워진 아이의 몸을 상상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속에서 더 자유로운 이가 있을 텐데. 땅 위에선 도리 없이 무거워도 물속에선 한없이 가볍고 유연한 몸. 찾아보니 서울 강덕구 고덕동에 수중재활센터가 있었다. (중략)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아이들을 단호하게 이끄는 지도 교사도 인상적이었다. 온몸을 감싼 검은색 수영 슈트가 물에 젖어 반짝거렸다. 유연하고 아름다운 바다사자 같아 보였다. 바다사자가 아이들을 이끌고 다니는 것 같았다. (중략)

따뜻한 습기로 가득 찬 수영장을 나와 고덕역까지 이어지는 겨울 가로수길을 걸으며 계속 생각했다. 물속에서 더 자유로운 아이들을.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따라가는, 드러나는 듯 드러나지 않는 바다사자를. 거의 매 페이지에 바다사자를 그려 넣기로 마음먹었다. 파도야 놀자의 엄마처럼, 나의 명원 화실의 ‘진짜 화가’처럼, 바다사자도 말없이 아이 곁을 지킨다. 어른은 그런 존재다.

– 『창비어린이』 70호 <그림책 『물이 되는 꿈』 작업 이야기> 

노랫말 속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그리던 작가님은 수중재활센터에서 방문해 물속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창비어린이』 에 실린 작업 이야기를 읽으며 바다사자가 아이들을 이끌던 지도 교사의 모습에서 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마음껏 헤엄쳐 나갈 수 있도록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곁에서 바라봐 주던 존재였지요.

<물이 되는 꿈> 노래를 들을 때면 가만히 눈을 감고 어떤 꿈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형태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주 자유로운 몸이 되어 이곳저곳을 자유로이 노니는 꿈을요. 이렇듯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선명하게 만들었을 노래에 그림책 작가의 서사가 새로 입혀졌지만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림 곳곳에 한참을 머물러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기 때문이지요. 그 여백에 나의 이야기를 계속 채워 넣을 수도 있고요. 

그림책 뒷면의 악보는 루시드폴 님이 직접 그렸습니다. 그 위에 이수지 작가님이 파랑 물감을 살짝 더했고요. 악보를 잘 읽지 못하는 제 눈에는 악보도 마치 그림처럼 보입니다. 특히 음표들 사이의 이음 표시들 덕분에 노래가 내내 웃고 있는 것 같아요. 산도 강도 바다도 모두 웃고 있습니다. 즐거운 꿈을 꾸고 있어서겠죠.

물을 그리는 작가, 이'수'지 

요즘 가만히 저의 아기를 바라보다 보면 어떻게 저렇게 쉴 새 없이 움직일 수 있을까 신기하곤 합니다. 정말 지치지도 않습니다(충전은 또 얼마나 빨리 되는지). 온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온통 에너지로 가득 찬 동적인 존재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바로 지금 제대로 놀겠다는 열정이 느껴지고요. 

이수지 작가님의 그림책 속에서는 이렇게 최선을 다해 지금을 즐기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작인 『파도야 놀자』(2008),  『선』(2017),  『여름이 온다』 (2021) 속 아이들을 함께 살펴볼까요. 『파도야 놀자』 속 아이는 파도와 한바탕 신나게 놀이하지요. 그림책 속 파도는 아이처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고요. 

『선』은 단단하게 언 물인 빙판 위를 노니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얼음 위에선 아이들의 몸짓이 평소와는 달라집니다. 빠르게 미끄러지며 만들어지는 몸짓은 꼭 춤을 추는 것 같아요. 때론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 여름에 물놀이 빼놓을 수 있나요. 아이들은 정말 물을 좋아합니다. 저의 아기는 목욕을 끝내고 나올 때마다 아쉬워서 울기까지 하거든요. 『여름이 온다』는 여름날을 실컷 즐기는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 그 건강한 에너지가 물과 함께 발산되지요. 이 세 그림책 모두 아이들이 생생하게 즐기는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이 물과 함께합니다. 

이수지 작가님 그림책 속 물의 모습이 이처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건 바로 어린이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처럼 동적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존재가 바로 어린이니까요.

이수지 작가님의 그림책으로는 끝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더 할 수 있고, 그러자면 이 레터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오늘은 짧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다음 시즌에서는 작가 특집으로 더 진득하게 다뤄보고 싶습니다.

그림책이 비범한 까닭은 매체 자체가 특이하거나 그 작가가 대단해서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보다도, 그림책이 말 걸고 있는 대상이자, 그림책의 출발점이었던 ‘어린이’라는 존재의 비범함에서 온 것 같았지요. 서너 살배기 아이가 알아듣도록 ‘신호등’ 혹은 ‘용감함’이 무엇인지 설명하려 노력한 적이 있다면 알 겁니다. 가장 단순하고 쉽게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요.

- 이수지 『이수지의 그림책』(2011, 비룡소)

“저의 책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림책이 향하는 대상이 결국 아이들이라는 것 그 자체에서 저는 에너지를 많이 받아요. 그냥 어린이들을 향해 있는 매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에게는 위로가 돼요. 무슨 그림책을 하든, 그 그림책에 아이가 등장하는지와 관계없이, 아이들을 향해 있는 매체를 다루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힘을 받아요. 그것이 저를 아이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힘을 내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죠.”

- 『릿터』25호 <이수지×소유정, 너를 향해 열린 작은 세계가 있어>

여러분! 🎉

이수지 작가님께서 한국인 최초로 2022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받으셨습니다.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만큼 아동문학의 최고의 권위를 지닌 상입니다. 그림책 편집자로 이렇게 벅찬 순간을 맞이할 수 있어 기쁩니다.

평생 어린이를 향한 마음을 담아 그림책을 만든 이수지 작가님이 이 상을 받은 건, 물이 순환하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 같습니다. 작가님의 수상이 얼마나 많은 어린이에게 바다처럼 깊고 넓은 꿈을 꾸게 할까요. 저도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꿈과 힘을 얻었습니다. 정말 축하드려요 :) 

기쁜 소식에 기쁜 소식 하나 더! 🎉

임진아 작가님께서 『빅이슈』 265호에 제가 발행하는 <그림책 바구니> 뉴스레터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읽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무척 기뻤는데, 이렇게 맑은 글로 그림책 바구니를 소개해 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덕분에 시즌 2를 구상하고 진행할 수 있는 큰 동력을 얻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그림책이 얼마나 즐겁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이 좋은 걸 나만 알고 있기엔 아깝다는 생각에 그림책 레터를 시작했었지요. 레터를 쓰다 보니 그림책이 더 좋아졌습니다!(그림책 너의 무한한 매력은 정말..)

아직 미정이지만 다시 시작할 시즌 2에서도 <그림책 바구니>로 그림책의 매력과 기쁨을 계속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가 어린이 곁에 선 든든한 어른으로, 작가 옆의 바다사자 편집자로 건강한 그림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제가 일을 좋아하며 즐기는 모습을 제 아기도 지켜봐 주겠지요. 

<물이 되는 꿈>만큼 좋아하는 루시드 폴 님의 노래 <kid>의 가사를 전하며 그림책 바구니 시즌 1을 종료합니다. 함께해 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걱정마 넌 우리보다 더 따뜻하단다
자랑스런 네 검은 피부 가리지마라
어리석은 이들의 눈빛 피하지마라
너는 똑똑하다 너는 건강하다 너는 아름답다
대한민국보다

지지 않는 네 엄마의 딸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온기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먹보다 위대한 이름 차별보다 거대한 이름
가르쳐 주어라 깨우쳐 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