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쿵, 주세요.” 

네 발로 타타타다 기는 아기가 재빨리 책장에서 빨간 사과가 그려진 표지를 가져옵니다. 우는 게 전부였던 아기가 언제 이렇게 자란 걸까요? 아기는 엄마, 아빠에 이어 애착 인형의 이름을 알아듣기 시작하더니 좋아하는 음식과(바나나, 치즈 소리를 들으면 일단 웁니다. 이름만 들어도 너무 먹고 싶어지기 때문에...) 몇 가지 사물의 이름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사과가 쿵!』은 아기에게는 긴 말임에도, 표지의 빨간 사과와 ‘쿵’이라는 강렬한 파열음 덕분에 아기의 기억력 창고에 빨리 저장된 것 같습니다. 아기는 요즘 촉감책 표지에 있는 빨간색 동그라미 스펀지를 먹으려고 책에 얼굴을 묻기도 하고, 그림책 바탕에 그려진 조그마한 무당벌레를 손으로 가리키며 긁기도 합니다. 확실히 빨갛고 동글동글한 물체는 시각을 열심히 발달시키는 중인 어린 아기들의 시선을 오래 붙잡아 두는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 부모님이 작은 사과밭 농사를 지으셨는데, 자주 그 밭에 경운기를 타고 가서 놀곤 했습니다.  초록색이던 사과가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아 붉게 익으면 아부지가 똑똑 따서 차곡차곡 상자에 담으셨지요. 그때 먹던 사과 맛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가 돌잡이를 할 때 다른 물건들보다 먼저 사과를 덥석 집었다는 걸 보면 무척 좋아하는 과일이었던 것 같아요(틀림없는 먹보 인증). 돌상 앞에 놓인 여러 물건 중에서도 빨갛고 동글동글한 사과에 손이 가지 않을 아기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요(역시 먹보만 그렇겠죠).

커다란 커어다란 사과가……

새빨갛고 커다란 사과 하나가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땅속엔 사과와 이어진 땅굴이 보이고, 사과의 옆면을 두더지가 뿅 뚫고 나왔습니다. 표지를 양쪽으로 펼치면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왼쪽 구석에서 개미들이 사과를 향해 열심히 기어 오는 것이 보이는데, 이 개미들의 눈 좀 보세요. 동그라미 안에 점 하나만 찍어둔 것 같은데도 사과를 향한 열정이 활활 불타오르는 게 느껴집니다.

이제 표지에서 보았던 개미 스무 마리가 야무지게 사과를 에워쌉니다. 작은 개미들은 작은 입으로 사과를 ‘야금 야금 야금’ 맛있게도 먹습니다. 이어서 벌과 나비, 애벌레도 사과에 찰싹 붙어 ‘쪽 쪽 쪽’ 사과를 빨아먹습니다. 실컷 먹고 난 개미들은 길을 떠나는데 두더지는 아직도 사과를 정신없이 갉아 먹는 중입니다.

이때 나타난 돼지와 토끼, 다람쥐가 ‘냠 냠 냠’ 사과를 조금씩 떼어 먹다 보니 사과의 아랫부분이 순식간에 동이 납니다. 실컷 먹고 난 동물들은 차례로 사과의 왼쪽에 자리를 잡고 다른 동물들을 구경하지요. 양팔을 옆구리에 척하니 올리고 구경 중인 동물들의 불룩한 배 좀 보세요.

너구리와 여우에 이어 입이 커다란 악어, 덩치 큰 사자와 곰, 목이 긴 기린과 코가 긴 코끼리까지 '우적 우적 우적 날름 날름 와사삭 와사삭' 사과를 먹어 치웁니다.  그렇게,  

모두들 배부르게 잘 먹었습니다.

처음 사과를 발견한 두더지를 제외하고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개미처럼 작은 동물부터 코끼리까지 점층적으로 몸집이 큰 동물이 여럿 등장합니다. 책을 보는 아기들은 이 반복적인 리듬을 감지하면서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신이 날 거예요. 다음 장에 ‘또’ 새로운 동물이 등장한다는 걸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기는 이 책을 여러 번 봐도 볼 때마다 흥이 오른 표정입니다. 볼수록 다음 장면에 대한 기분 좋은 설렘이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평화롭던 이곳에 갑작스럽게 변화가 찾아옵니다.

아!

비가 내리네.

사과가 떨어진 하늘에서 이번엔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비는 이야기에 커다란 반전을 주며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짧은 이야기지만 과장과 반복, 변주를  통해 이야기에 아주 흠뻑 빠지게 해 줍니다. 괜히 아기 그림책의 조상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과가 쿵!』을 아기와 여러 번 읽다 보니 익숙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우크라이나 민화를 바탕으로 만든 그림책 『장갑』이었지요. 추운 겨울날, 숲에 떨어진 장갑을 발견한 생쥐가 그 속에서 다른 동물들과 함께 겨울을 나는 포근한 이야기입니다. 겉에서 볼 때 장갑의 크기는 사람 손보다 조금 크지만, 장갑 속은 새로운 동물들이 추위를 피해 들어갈 때마다 끝도 없이 늘어납니다. 숲에 떨어진 우연한 행운 덕분에 동물들은 장갑 속에서 서로 몸을 맞대며 따뜻한 겨울나기를 하게 되지요. 

“모두들 배부르게 잘 먹었습니다.”

“하지만 걱정 없어요.”

제가 책 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기분 좋게 사과를 배불리 먹었다는 것, 그리고 갑자기 비가 왔지만 걱정할 게 없다는 말은 아주 든든한 응원을 받는 기분입니다. 배고프지 않고 걱정 없는 것만큼 행복한 상태가 또 있을까요. 아기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림책을 통해 앞으로 만날 세상이 넉넉하고 안전한 세상일 거라는 기대가 자라는 데 큰 힘이 되어 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모두가 웃고 있는 기분 좋은 결말이 읽을 때마다 충만한 만족감을 줍니다. 

그림책 작가이자 만화가로 활동 중인 다다 히로시는 개구쟁이 아기를 닮은 동물들을 하나하나 개성 있게 그렸습니다. 하얀색 바탕에는 초록 잔디만 그려 빨간 사과와 등장하는 동물들에 온 시선을 집중하게 하지요. 연극 무대처럼 반복되는 배경에는 다양한 크기의 동물들이 오르내립니다. 사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유일한 주인공이지만 동물들이 한 입 두 입 먹기 시작하면서 모양이 점점 바뀌더니 마침내 비를 막는 우산으로 변신까지 합니다. 

동물들의 눈동자와 표정도 유심히 관찰하면 재밌습니다. 자꾸만 여러 동물이 사과를 먹으러 오자 당황한 두더지와 다른 동물이 등장할 때 옆에 앉아서 지켜보는 동물들의 눈동자 방향에 주목해 주세요. 동물들은 커다란 사과를 보다가도 새로 등장한 동물에 절로 시선이 갑니다. 또, 비가 올 땐 다들 하늘로 눈동자가 향해 있지요. 동물마다 사과를 먹는 소리가 다르게 나서 읽어 주는 재미도 듣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1976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사과가 쿵!』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0-3세 아기책 분야에서는 여전히 스테디셀러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후기를 보다가 어릴 때 봤던 책을 아기와 다시 보는 기쁨을 맛보는 분들이 꽤 많아 무척 부러웠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어릴 때는 이 책을 보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오래도록 좋아하던 그림책을 엄마가 되어 아기와 함께 읽는 기쁨도 그에 못지않다고 생각하며, 부러움은 접어 둡니다. 우리가 앞으로 함께 읽을 그림책은 수도 없이 많으니까요 :)